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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현 명예기자 slo_moh@hanmail.net
"하나님은 항상 저와 함께 하시니까요."
외국인 노동자 '앨리스'의 겨울나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시니까요." 앨리스는 밝게 웃습니다.

세밑 추위가 절로 어깨를 움츠러들게 하는 추운 날씨입니다. 상계동에 위치한 산부인과에 들어서자, 곳곳에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의 온기가 방문객들의 옷깃에 묻은 추위를 말끔히 털어줍니다.

그 때 배가 불룩하게 불러 온 한 산모가 행복과 기대에 찬 얼굴로 진료실에 들어섭니다. 아마 그녀는 곧 태어날 아가에게 한시라도 빨리 따뜻한 세상의 온기를 전해주고 싶겠지요.

진료 대기실 곳곳에 놓인 크리스마스 장식물들은 태어날 아기천사에게 금방이라도 축복의 노래를 들려줄 것만 같이 따스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런 대기실 한 귀퉁이에 조용히 앉아 있는 외국인 여성이 눈에 띕니다. 병원까지 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그녀의 얼굴에는 초조한 빛이 역력합니다.

초콜릿 색 피부에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한데 묶은 그녀의 이름은 앨리스(32)입니다. 그녀는 고향인 케냐를 떠나 한국에 온지 이제 2년이 되어 가는 외국인 노동자입니다. 그녀 손등의 튼 살과 거칠어진 손마디가 고향을 떠나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고단한 여정을 말해줍니다.

앨리스는 고향 케냐에서 7년간 회사 비서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2년 전 비즈니스 비자를 받아 한국에 들어왔다가 스카치 테입 제조 공장에 취직을 했지요. 하루 11시간의 근무에 때로는 주일의 예배시간마저 반납한 채 일을 해야 했지만, 돌아오는 댓가는 그다지 많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피부색이 유난히 짙은 아프리카계 사람이라는 이유로, 받아야 했던 냉대와 욕설은 그녀의 가슴 속에 깊은 멍자욱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힘들어도 꿋꿋이 참고 다녔던 공장 생활마저 얼마 전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공장의 일거리가 줄어들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만 했지요. 그녀는 현재 가나에서 온 외국인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는 일을 하며, 그곳에서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런 그녀가 ‘하파캠’ 행사의 외국인 노동자 무료 검진을 받았던 것은 약 보름 전이었습니다. 그 때 그녀를 진찰하던 내과 의료진이 그녀의 복부 아래쪽에 혹이 잡힌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요.

그녀가 이상 증세를 느낀 것은 넉 달 정도 되었지만, 지금껏 자신의 몸을 돌 볼 겨를은 없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럴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요. 결국 의료진의 도움으로 정밀 진단을 받게 되었고, 초조한 마음으로 산부인과를 찾게 된 것입니다.

▲앨리스에게 내려진 진단 결과는 너무나 가혹하기만 합니다.

앨리스의 신상에 대한 문답이 이어진 후, 곧바로 초음파 검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진단 결과, 앨리스의 현재 상태는 낙관적이지 않았습니다. 앨리스의 자궁 안쪽에는 이미 3개의 혹이 크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암은 아닌 듯 했지만, 보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 혈액 검사를 받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의사 선생님의 말씀은 청천벽력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앨리스는 아기를 낳을 수 없을 거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미 혹이 자궁 안쪽에 크게 자리 잡은 상태인데다, 혹 제거 수술을 할 경우 자궁까지 들어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설령 수술을 하지 않는다 해도 현재 상태로는 아이를 가지기 힘들고, 그대로 둔다면 앞으로 통증과 출혈이 더욱 심해질 것이랍니다.

돈을 벌면 무엇을 하고 싶냐는 물음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게 살고 싶다던 그녀. 아직 배우자도, 애인도 없는 그녀에게 내려진 진단 결과는 너무도 가혹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뜻밖에도 담담했습니다. 혈액 검사를 하는 동안에는 연신 무서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주사를 놓으려는 간호사와 장난스런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지요.

'그녀는 진단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절망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을까요?' 의사 선생님은 “이러한 사실이 그녀에게 엄청난 충격을 줄수 있으니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매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죠.

그러나 되돌아온 그녀의 대답은 지극히 명료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저 자신에 대해 더 잘 아시고,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실 테니까요.”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그녀 역시 독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녀는 현재 WCNI(World Computer Network Institute:외국인컴퓨터 선교회)에서 주관하는 컴퓨터 수업과 영어 예배에 참석하고 있습니다. 이태원의 한 교회에 함께 다니던 나이지리아 친구의 소개로 참석하게 된 영어 예배는 고단한 타향살이에 신실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지요.

언젠가는 직접 사역에도 참여하고 싶다는 그녀는, 어쩌면 지금껏 그 모든 역경과 어려움을 지금처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그녀에게 가장 큰 고민은 일자리입니다. 일자리가 안정되어야 지속적인 치료도 받고, 추운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테니까요.

이억만리 타향에서 여러 가지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녀에게 딱히 위로해 줄 말이 없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고향 케냐에 대해 묻자 어두웠던 그녀의 얼굴이 금세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고향 케냐도 춥긴 하지만 한국만큼은 춥지 않다며 밝게 웃기도 하고, 킬리만자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늘어놓기도 합니다.

가족들이 그립고, 하루 빨리 직장을 구해서 돈도 벌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만나고 싶다고 얘기하는 그녀의 마음은 이미 케냐에 닿아 있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어린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고 싶다며 수줍게 웃는 그녀를 보면서 누군가에겐 평범한 일상이, 누군가에겐 절실한 소망이 될 수도 있다는 현실에 가슴이 아려오는 순간입니다.

진료를 받게 해 준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는 앨리스. 충격적인 진단결과를 들어도 시종 낙천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얼굴 한 켠에 드리운 수심에 찬 그림자는 채 걷어내지 못한 듯 합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뒷모습에서 조금은 쓸쓸한 기운이 느껴집니다.

부디 그녀의 겨울이 너무 매섭지 않기를, 그리고 혈액 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볼 뿐입니다.

▲"하루빨리 직장을 구해 돈도 벌고, 고향에서 가족들을 만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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