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과 방송에서 일명 ‘목도리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우연히 아마추어 작가의 카메라에 노숙자 할아버지를 돕는 한 여성이 잡히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동영상은 인터넷에 올려졌고, 네티즌 사이에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삽시간에 인터넷을 장악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목도리녀’의 실명이 공개되고, 가족들의 선행(善行)까지 알려지면서 목도리녀에 대한 관심이 한층 높아졌다. 그녀의 선행은 높이 평가받아야만 한다. 그러나 어쩌면 가볍게 넘길수도 있던 이 선행이 특별히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특히 한국 사회에 ‘목도리녀’와 같이 종종 이목을 끄는 선행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선(善)이 사라진 사회
외국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면서 가장 해석하기 어려운 단어로 ‘정(情)’이라는 단어를 꼽는다. 그 이유는 사랑도 아니요, 은혜도 아니고, 감사도 아닌 것이 이웃간에 따뜻함을 주며 때론 피보다 더 강한 유대감까지 형성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어야 속시원하고, 애경사(哀慶事) 때는 누구보다 발벗고 나서게 만드는 것이 정(情)이기 때문이다.
한 때, 광고에서도 중요하게 등장하던 정(情)이라는 단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윗집의 발자국 소리에도 싸움이 일어나고, 옆집에 사는 노부부가 죽어서 며칠이 지나도 모르는 세상이 현재 한국 사회다. 더욱이 서울역을 비롯하여 지하상가나 지하철역에 노숙하고 있는 노숙자들에 대한 관심은 걱정과 염려가 아닌 비난과 외면으로 바라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일 것이다.
선행(善行) 자체보다 여성에 관심이
그렇다면, 노숙자 할아버지를 돕는 여성에 대해 큰 관심을 갖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으로 선행에 대한 일반인들의 대리만족으로 볼 수 있다. 이 사회가 삐뚤어진 사회라고 하지만, 그래도 선(善)이라는 단어에 대한 부담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이 때 한 여성의 선행을 통하여 자신과 비교하게 되고, 자신을 책망함과 동시에 선을 행하였을 때 느껴질 감정을 사진과 동영상을 보고 대신 갖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선행(善行) 자체보다는 노숙자 할아버지를 돕는 여성에 관심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노숙자 할아버지를 도와 준 여성이 누구인가?’에 사회는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의 본질에 대해 뒤를 밟아 보고 싶은 사람의 심리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의 출신학교, 가족, 나이, 외모, 주위의 평판 등에 자연스럽게 귀를 기울이게 된다.
악한 사회에 대한 반증과 선(善)에 대한 모델 필요
무엇보다 한국 사회는 거짓과 불신이 가득한 사회라는 것을 이 사건을 통해 느끼게 된다. 선행이 새롭게 느껴지고 열광에 가깝게 관심을 갖는 이유는 사회가 그만큼 거짓과 불신, 아픔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선(善)에 대한 확실한 모델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선(善)에 대한 이렇다 할 정의나 모델을 찾을 수 없는 사회가 한국 사회이다.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는 모든 국민들에게 만연되었고, 부모에게 폭행을 하는 자녀, 아동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학대하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매스컴에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선행에 대한 모델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는가?
누구보다 기독인의 책임
한 뉴스에서는 목도리녀의 타이틀을 ‘현대판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보도하였다. 낯익은 단어의 등장으로 자부심을 느낄지도 모르지만 기독교인에 대한 불만의 소리를 한편으로 들을 수 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선(善)을 강조한다. 목숨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주고 헌신할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기독인들은 어두운 곳보다 밝은 곳을 선호하게 되었다. 멋진 인테리어로 짜여진 교회를 원하고, 작고 허름한 교회는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한자 ‘信’(믿을 신)이라는 단어에는 ‘신앙, 신뢰, 신실함’ 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신실함’이란 행동으로써 나타내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마음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신뢰, 의지와 함께 행동으로써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 선(善)을 실천하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 많은 유익을 준 것에 대해 누구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열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눈에 띄는 것처럼 한국 기독교의 연약함이 한국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사실이다.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것은 빛밖에 없다. 이 사회의 어두움을 밝힐 수 있는 대안은 기독인들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빛과 소금이기 때문이다. ‘목도리녀’가 기독교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목도리녀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한국 사회를 책임지고 기도하며 빛을 비추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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