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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배를 담은 질그릇
[김광건의 성공인을 위한 말씀] 고린도후서 4장 7~10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린도후서 4:7~10)
고린도후서 4장 7~10절은 바로 그런 얘기를 한다. 역설의 진리. 바울이 좋아하는 표현이다. 바울은 거꾸로 말한다. 안 어울리는 것을 서로 들이대면서 더 강조를 하고 있다. 바울은 그릇 이야기를 하는데 ‘보배가 질그릇에 있다.’고 한다. 사람이 볼 때는 어울리지 않는 모양이나 하나님의 뜻이 여기 있다고 한다. 질그릇은 아주 천한 그릇이다. 못생기고 약하고 값싼 그저 그런 그릇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장 귀한 보배를 가장 천한 질그릇에 담는다고 말씀하신다. 보배는 성령이고 질그릇은 우리다. 우리는 귀하다. 우리는 강하다. 그런데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가 정말 귀한 게 아니라, 우리는 질그릇처럼 천하고 약하지만, 망하지 않는 이유는 이 그릇 속에 담긴 보배 덕분이다. 이 보배 덕분에 연약한 우리가 강해졌다는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로부터 ‘큰 그릇’이라는 칭찬을 듣고 기분 좋았던 적이 있었다. 정치인이나 CEO를 평가할 때도 그릇으로 평가한다. 큰 그릇이다, 작은 그릇이다. 따지고 보니 인재를 언급할 때는 그릇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 깊이 생각해 볼 문제다. 우리 모습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무엇을 담을 가능성을 놓고 평가하는 것이다. 즉, 그릇으로서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그릇인데 특별히 영을 담는 그릇이라고 성경은 말한다. 사람마다 귀신이나 다른 영을 담기도 하고 성령을 담기도 한다. 왜냐면 우리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는 이 땅에서 영을 담는 그릇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담는 그릇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를 질그릇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왜 그릇이야기를 했는가. 로마시대엔 사람들이 그릇에 집착했다. 금그릇, 은그릇으로 자신의 신분과 귀천이 결정됐다. 여러 그릇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별 것 없다. 그냥 질그릇이다. 흙으로 빚은 평범한 그릇이다. 하찮고 약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귀한 성령을 질그릇 같은 우리에게 부으셨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비가 있다.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나는데, 이건 질그릇으로부터가 아니라 보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겸손해라’는 것이다. 김삼성 선교사란 분이 있다. 멀쩡하게 독일 유학을 하다가 선교의 부름을 받고 카자흐스탄에 가 계신 분이다. 많은 선교사들이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역이 힘들어서 주로 현지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사역을 한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긴 중요하다. 그런데 이분은 꿋꿋이 현지인 사역만 하는데, 그 황무지같은 회교권에서 교회에 5천명이 모인다. 이분은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는 ‘성령파’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역사를 일으킨다. 어떨 땐 귀신 쫓을 때 김 선교사님 자신도 겁이 난다고 한다. 이거 안 나으면 어떻게 하나. 근데 자신의 은사가 믿음의 은사란다. ‘이거 꼭 나을 것이다. 추진하면 될 것이다.’는 믿음이 있단다. 귀신 쫓을 때도 ‘이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나는 별거 아니다. 그러나 내 안의 성령이 알아서 하실 거다.’ 그리고 명한단다.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 나가라.’ 이분 참 겸손하다. ‘난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내 속의 성령, 보배께서 알아서 하신다.’ 이게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강력하게 쓰임 받는 하나님의 사람들일수록 인간적으로는 금그릇이 아니다. 오히려 형편없는 질그릇이다. 내세울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 거기에 보배를 부으신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에게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는데 안 고쳐주신다는 응답이 왔다. 그리고 바울은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질그릇일 때,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극대화되리라.’ 내가 가진 지위와 능력이 무엇이든지 우리는 질그릇이다. 깨지기 쉽고, 온전치 못하고, 그저 겨우 그릇 용도나 감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여기에 성령을 부으시고, 능력을 나타내신다. 하나님께서 일을 맡기실 때는 질그릇을 보고 거기에 성령을 부으신다. 우리의 능력의 이유는 우리 속의 보배에 있다. 우리가 안전한 것도 보배 때문이다. 어떤 위기가 와도 문제가 없다. 우리가 강한 게 아니라 우리 속에 보배가 있기 때문이다. 얼마전 오르세미술관 전시회 때 TV에서 세계적 명품들이 한국으로 공수가 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이건 대통령 경호 저리 가라다. 도난이나 훼손에 대비한 보험만 해도 상상을 초월한다. 비행기도 아주 보안이 철저해서, 선택된 사람만 탄다. 밀레의 ‘만종’을 포장하는데만 열 몇 겹이다. 그림 하나 넣는데 상자가 집채만 하다. 보안요원들이 나가고 극비에 화랑으로 옮겨지고 습도, 온도 조절하고. 행여나 그림이 손상을 입을까봐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아 보배는 저렇게 다루는구나.’ 보배가 있으면 더불어 안전해진다. 같이 보호를 받는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땅에서 안전하게 살려면 보배를 붙들어야 한다. 내 속에 보배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키실 것이다. 건강 조심한다고 해서 안전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예수를 품을 때, 그리하여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실 때, 그것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게 되는 것이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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