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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자살은 ‘하나님의 주권’ 에 대한 부정이다
지난 한 주간 내내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것은 고 최진실의 죽음에 관한 것이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모인 곳은 어디가 되었든,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소문을 화두로 해서 회자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이미 한 줌의 재로 변했다. 하지만 그녀의 죽음과 관련한 억측들은 그 근거도 확인되지 않은 채 천리만리를 마다하지 않고 퍼지고 있다.
지난 한 주간 그녀의 이름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만 그녀의 죽음에 대해서 안쓰러워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저 하기 좋아서 하는 남의 이야기 정도가 아닐까.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은 무심코 던진 한 마디에 상처를 입었으련만, 정작 사람들은 그녀의 죽음을 화두로 삼는 정도로 지나치고 있으니 말이다. ![]() 연이은 유명 인사들의 자살이 사회에 미치는 폐해는 그 정도를 파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를 든다면 사회 구성원들의 마음에 담기는 부정적이고 냉소적인 의식은 사회 분위기를 위축시킨다. 공동체로서의 사회이기 보다는 경쟁과 자기방어를 전제로 하는 심각한 불신적 관계를 만들게 될 것이다. 자라는 청소년들에게는 우상과 같은 연예인들이기에 가치관 자체가 염세적이거나 생명을 경시하는 가치관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자살은 개인의 선택 사항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인간의 존재가 스스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기에 개인은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자신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즉 개인은 결코 개인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존재하는 것까지도 가족이라는 관계에서 가능했기 때문에 자신의 선택은 개인의 문제로 남겨지는 것이 아니라 가족의 문제로 남겨진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개인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그 충격과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일이 남겨진다. 자녀들은 자녀대로, 부모와 형제들은 그들대로 고통을 당해야 한다. 하지만 죽음을 택한 사람은 말이 없다. 모든 고통을 남겨두었을 뿐이다. 그는 갔지만 그가 가장 아끼던 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고통은 그대로인 것이랴. 그런데 최근에 이어지는 자살의 주인공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 사실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이다. 즉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조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이다. 창조를 믿는다는 말은 자신의 존재 의미와 가치까지도 하나님에 의한 것임을 믿는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존재 자체를 자신의 의지로 부정하거나 그 책임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인 그들이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그 책임을 죽음을 택한 개인에게만 전가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단지 개인의 문제이거나 사회적 책임이 부족해서 개인의 죽음을 방치한 것이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개인의 문제로만 남겨두거나, 사회적 책임의식의 결여라고 하는 사회적인 문제로만 남겨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적 책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자기 몸집을 키워가는 데는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이지만 소수자들이나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는 지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자살의 문제가 단지 관심과 배려만 있으면 없어질 것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전제하되 교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관심과 배려만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가 해야 할 중요한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 정체성과 존재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성경 신앙을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책임을 묻고 싶다. 교회가 개인의 구원과 복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가르침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신앙은 단지 개인의 구원과 복을 말하거나,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신앙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창조 목적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존재 목적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있음을 믿는 신앙이다. 이 신앙을 전제했을 때, 구원의 의미는 단지 미래에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구원을 말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타락의 의미와 타락으로 인해서 주어진 형벌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을 하나의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기독교 세계관이한다. 이 세계관을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하고, 그 고백을 통해서 자존감과 존재의식과 목적을 자기 안에 확립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 세계관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의 기준이어야 하고, 언행의 근거이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고백이 곧 자신의 모습이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의 구원과 복도 모두 이 틀 안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교육은 성경공부까지도 개인의 구원과 복에, 조금 나아가서 이웃을 섬기는 봉사의 삶 정도를 강조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그러한 것들까지도 하나님의 창조신앙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며, 창조 목적에 귀결되도록 가르쳐야만 할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요행을 구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자신의 삶으로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은 결코 양심의 자유나, 인간의 자유의지의 표현일 수 없다. 자살은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의 신앙은 처음(시작)과 나중(끝)이 모두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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