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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신 장로 / 무등산공유화재단 이사
[그 섬에서] 유언으로 가슴에 남은 어머님의 유머
그 섬에서 - 98

▲어머니 43세 때 자녀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 ©뉴스미션

나의 어머니는 살아계시면 금년 우리나이로 93세시다. 8년 전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가 돌아가셨다. 미국 사시는 누님들이 이제 60대 중 후반이고, 내 나이 63세이니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도 이제는 몇 남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생이 짧은 세상을 살다가 시나브로 잊혀지고 100년이 지나면 가까운 가족의 기억에서 조차 사라지는 것이지만, 누구에게도 어머니만은 그렇게 잊고 싶지 않은 분 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이제는 누님들과 함께 할 때도 어머니 이야기를 성글게 할 뿐이다.

어머니(김신애 권사)는 1917년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김이준씨의 여러 딸 들 중 하나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다고 한다. 만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사춘기를 보내며 시집갈 나이를 채우고 있을 때 도회지에서 공부한 삼촌의 눈에 띄었다. 그 삼촌이 3.1운동 때 인쇄된 독립선언문을 운반하며 어른들의 심부름을 한 김창준 전도사다.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중 하나이다. 나중에 감리교단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해방 후 북한으로 올라가서 남쪽에서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도 금기가 된 분이다.

그 삼촌이 조카의 영특함을 보고 평양으로 데려와 당시 기독교 학교인 정의고녀에 입학하게 해 주었다. 그 학교에서 사감인 이태영 선생과 교목이었던 정일형 목사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정희고녀를 졸업하고, 역시 삼촌의 권면으로 서울로 유학하여 이화여전을 다녔다.

어머니는 영문학을 전공했고, 이화여전 학생 대표였던 성악가 김자경님과 같은 해 졸업을 하셨다. 졸업 후 잠시 경성시립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다가 당시 경성제국대학에 다니던 아버지를 만나 연애결혼을 하셨다.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대학을 졸업한 아버지는 함경북도 회령 상업학교에서 선생으로 신혼을 보내셨다. 해방공간에서 당시 지식인이며, 민족주의자의 전형으로 사회주의 사상에 경도되어 활동하던 아버지는 6.25때 산에 올라갔다가 변을 당하셨다. 그때 어머니 나이 34세. 내 위로 누님 둘 여동생 하나, 이렇게 4남매가 어머니 몫으로 남았다. 그때부터 자녀들을 키우며 교육을 시키느라고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셨다.

어머니는 미인이었고 멋쟁이였고 인텔리였다. 아이들이 넷 이었지만 젊은 나이였다. 나이로 보면 아직 꽃이 한창 피기도 전이었다. 아이들이 없었거나, 그 시대가 아니었다면 충분히 드라마의 여주인공 같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처음 서양 영화를 보고 어머니보다 더 예쁜 여인이 세상에 있다는 걸 알고는 일주일 동안 절망에 빠졌던 기억이 있다. 그때의 어머니를 생각하고, 나의 아내가 그 나이를 지나고, 이제 며느리가 그 나이가 되는 걸 보면서 우리 4남매를 위해 희생한 어머니의 젊음이 너무 안쓰럽고 죄송할 뿐이다.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보다 아는 게 더 많았고, 그래서 나에게는 백과사전이나 참고서가 필요 없었다. 아버지 몫까지 하시느라고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무척 엄하셨다. 사춘기가 될 때까지 어머니는 나에게 가장 무서운 분이셨다.

어머니에게 반항하던 사춘기 시절을 회상할 때 나는 가장 괴롭다. 외아들로서 나는 어머니에게 효도해 드린 기억이 별로 없다.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는 술 때문에 어머니를 많이 실망시켜드렸다. 나는 어려서 부터의 소극적이고 소심한 성격을 벗어나고 싶어 술좌석엘 빠지지 않았다. 술좌석이 생기면 절반은 별 의식 없이 참석했지만 절반은 내가 원해서 술을 먹었다. 내가 술을 먹고 들어오면 어머니는 다음 날 하루를 금식하셨다. 3,4일씩 금식을 계속 하신 적도 있었다. 못된 아들이었다.

모범생이었고 재능이 있는 누님들은 고등학생 때부터 입주가정교사였다. 어머니의 기도와 교육의 결과였다. 딸들로 인해 어머니는 많은 위로를 받으셨다. 1960년대 후반, 대학을 졸업한 누님들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늘의 별따기 같이 어려운 관문을 어떻게 통과했는지 모른다. 당시 우리 가족은 연좌제라는 족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때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다음 처음으로 맘 편하게 생활비로 쓸 수 있는 봉급을 만져 보셨을 것이다. 그때까지 누님들이 우리 가족의 생활비와 동생들의 교육비를 책임졌다. 내가 결혼을 하고, 직장에 근무하면서 얻은 경제적인 안정이 어머니에게는 그나마 작은 행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그 무렵 시집간 누이동생이 언니들이 사는 미국 이주를 꿈꾸다가 어렵사리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 도착 두 달 후, 남편과 다툼을 하다가 사고로 유명을 달리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결혼 9년 만에 남편을 잃고, 27년 후 막내딸을 가슴에 묻은 것이다. 어머니는 그해 가을을 내내 무너진 가슴으로 보내셨다. 막내딸이 남긴 외손자 울음소리가 밤마다 들린다고 하셨다. 막내가 죽은 후 4개월이 지나서 미국으로 건너가셨다. 거기서 막내딸의 외손자가 18살이 될 때까지 보호자가 되어 함께 사셨다.

외손자가 성년이 될 무렵 어머니에게 치매가 찾아왔다. 미국서 누님들의 수고가 많았다. 돌아가시기 4년 전, 한국의 아들에게로 돌아오면서 어머니는 삶의 끈을 놓으셨다. 서서히 망각과 상실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갔다. 어머니는 평생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사신 분이라 유머에 서툰 분이었는데, 치매가 깊어질 무렵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해 주는 잊지 못할 유머(?)를 남기셨다.

아내가 어머니를 목욕 시켜드리며 여쭤봤다. “어머니, 제가 누군지 아시겠어요?”한참을 물끄러미 며느리를 처다 보다가 이렇게 말씀 하시는 것이었다. “네가 누구인지는 네가 더 잘 알 것 아니냐?”

또 한 번은 미국에서 작은 누님 가족이 찾아왔다. 외손녀들이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외할머니 오래간만이에요!” 얼굴에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물끄러미 손녀들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네가 말이냐, 내가 말이냐?”

너무 철학적(?)이고 수준 높은 유머여서 생각할 때마다 웃음보다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머니의 유머가 우리들에게 유언으로 남은 셈이다.

얼마 후 어머니는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효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떠나셨다. 아들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두셨다. 우연인지, 그날을 기다리셨는지 50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바로 그날 밤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지난 주, 미국 사는 큰 누님 내외가 섬을 다녀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큰 누님은 아내에게는 시어머니, 아이들에게는 할머니 역할을 한다. 그 누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돌아가신 분보다는 손주들 이야기 하느라고 마음이 바빴다. 어머니에게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큰 누님과 외아들이 함께 있어도 이제 돌아가신 어머니는 저 멀리 가 계신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손자들이 생기면 꿈에서도 어머니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 모든 노인들의 어머니는 자녀들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것이다.

더욱이 기억마저 희미한 나의 아이들에게, 그리고 그 할머니가 안 계신 것이나 다름없는 손주들에게 증조할머니의 전설 한 토막을 남기기 위해 어머니 이야기를 되새겨 봤다. 살아계신다면 내일 모래가 어머니 93세 생신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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