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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발발 60주년 인터뷰
6.25 전쟁 생존자, 조성구 할아버지
[편집자 주] 2010년, 6.25 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이 됐다. 남북이 여전히 휴전 상태인 지금도 전쟁의 아픔은 계속되고 있다. 시간이 흐르는 만큼 전쟁을 겪은 생존자들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60주년을 맞이하여 6.25 전쟁 경험자를 인터뷰해보았다.
인민군들은 매일같이 수십 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진지에는 포탄을 피할 차폐나 은폐물이 전혀 없었다. 산마루에서 적탄이 날아오면 바닥에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포탄에 앞서 들려오는 소리로 낙하지점을 겨우 가늠했다. 엎드린 곳에서 수 미터 이내에 포탄이 떨어지기도 했다. 59년 전 전쟁터에서 포탄을 피하던 어린 군인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경기도 평택시 안중읍에 살고 있는 조성구(78) 할아버지는 6.25 당시 19살이었다. 1948년 3월 자원입대로 군 생활을 한지 2년이 조금 넘은 해였다. “전쟁터는 사지(死地)였다”
그날 저녁 조씨는 자신의 주먹밥을 먹이고 윤하사를 특공대로 보냈다. 밤 10시 쯤 적의 고지에서 수류탄 터지는 소리와 총소리와 요란했다. “성공이고 뭐고 윤하사가 살아왔으면하는 마음이 더 간절했지. 보낸 책임이 있으니까. 그날 밤은 잠이 못잤지” 윤 하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이튿날 공격명령이 떨어졌다. 약간의 다발총과 장총의 소리가 들릴 뿐 기관총은 잠잠했다. 특공대원들의 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분대원들과 조 할아버지는 적군의 진지로 전진했다. 그때 조 할아버지가 구덩이에서 윤 하사를 발견했다. “피를 많이 흘려서 하얘진 얼굴로 명만 간신히 붙어 있더라고. 나를 보고 ‘물...물...’해. 피를 많이 흘리면 갈증이 나니까. 내 수통에 있는 물을 주고 대원들을 시켜서 후송시켰어” 그 뒤로 윤 하사 소식은 듣지 못했다. “아마 살았다면 나처럼 상이군인이 됐을 거야” 조성구 할아버지의 얼굴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부상자가 속출했지만 공격은 계속됐다. 전진 중 엎드려 전방을 관찰할 때였다. 갑자기 적의 야포탄이 날아와 폭발했다. 엉덩이와 등이 뜨끔하였다. 손에 뜨끈뜨끈한 피가 묻어나왔다. 그리고 또 다시 수발의 포탄이 날아와 좌측 안부를 때렸다. 두 눈에서 불이 번쩍 일어나고 얼굴에서 피가 흘렀다. 더 버티다가는 죽겠구나 싶었다. 쏟아지는 공격을 피해 겨우 안전지대에 도달했다. 부상으로 조 할아버지는 부산육군병원으로 후송됐다. “아직 파편이 여러 개 남아있어” 조 할아버지가 양말을 벗어 오른쪽 발등을 보여주었다. 까만 파편이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등 왼쪽에도 파편이 박혀있다. 이 참전 용사는 전쟁 동안 두 번 병원에 입원했다. 생과 사가 갈리는 병원은 전쟁터와 다르지 않았다. “매일매일 사람이 죽어나가지. 앰뷸런스로 부상자가 한없이 들어왔지만 그만큼 나가는 곳이 국군병원이야” 사상자가 많아 병력이 항상 부족했다. “훈련소에서 하루 500명이 나오는데도 병력이 모자랐어. 보충병을 요청해도 하루 저녁 전투하고 나면 전사자랑 부상자가 태반인걸. 대대장이고 행정요원이고 모두 동원됐지” 6.25 전쟁이 일어난 3년 동안 국군의 전사자 수만 14만 7천여 명이다. “제 유골이 아닌 순국선열 많을 것” “이건 비밀인데” 조심스레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국립묘지에 안장된 전사자들 있잖아, 사실은 자기 유골이 아닌 것들이 많을 거야” 조 할아버지는 전쟁 중 인사계에 있으면서 전사자와 부상자 등을 보고했다. 전쟁 중이었지만 보고와 확인은 철저히 이루어졌다. “아주 철저했어. 사망자가 있으면 시체 수를 꼭 확인했으니까. 그런데 전쟁 중에 모든 시신이 수습이 되나. 시체 찾으러 적 코앞까지 갔다 돌아오고 또 갔다 돌아오고 했지” 할아버지가 춘천에서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한 뙈기의 땅이라도 더 진격하기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성공하는 것은 3번 중 1번꼴이었다. “공격에 실패하고 내려오는데 전사자들을 데리고 올 틈이 있나. 내 코가 석잔데. 그때 살려달라고, 살려달라고 하던 사람들이 아직도... 그 사람들을 생각하면...내가...” 적의 탄환이 등 뒤에서 쏟아지는 상황에서 시체 수습은커녕 부상자도 데리고 오지 못했다. 그때를 회상하던 조성구씨의 목이 잠겼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죄책감으로 남아있다. 전쟁터에서 시신을 찾지 못해도 유족들에게 유골을 전하는 것은 남은 군인들의 책임이었다. 전사자의 시체가 모두 확보된 후에도 시신 수습은 쉬운 작업이 아니었다. “톱이 없으니까 장검으로 턱턱 나무를 해와. 차곡차곡 쌓아서 기름을 붓고 그 위에 시체를 차곡차곡 엎어놓는 거야. 그 위에 태극기를 덮고 화장을 했지” 전쟁터에서 화장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화장 중에 배가 터지고 내장이 나올 수 있어서 시체는 엎어놓고 화장을 했다. “그렇게 하루 종일 태웠어. 이튿날 아침에 유골을 나누어 담았지. 이렇게 담으니, 자기 유골이 아닌 경우도 꽤 많을 거야” 그럼에도 유족들은 유골함을 안고 통곡을 한다. 살아남은 자에게도, 죽은 자에게도 비극인 셈이다. 무명고지에서의 승리, 그리고 무공훈장 후퇴와 패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1년 9월 무명고지에서는 대승을 거두었다. 밤 10시경부터 시작된 교전은 날이 밝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유례없는 치열한 전투였다. 한 때 수류탄 투척 거리까지 적군이 사격을 하면서 기어 올라왔다. 하지만 조성구 하사는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며 용감히 싸웠다. 날이 밝아 퇴각하는 적진을 추격하였고 대승을 거두었다. 적군 사망자가 50여명, 다발총 십 여 정, 장총 수십 정, 포로 9명, 권총 4정, 시체에서 거두어들인 빵과 쌀, 적군이 착용하던 상해 운동화 100개가 남았다. 1953년 6월에는 야간 공격을 감행한 적군을 격파했다. 이 공로로 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할아버지는 두개 유공자증이 있다. 하나는 전상군경7급 유공자증이고 나머지 하나는 무공수훈자 증이다. “그땐 훈장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하루 지나면 아.. 오늘 살았다고 안심하는 게 전쟁터야. 군인들한테는 휴가가 훈장 10개 값어치였어. 가족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휴가를 나가야 알 수 있으니까” 3년간에 걸친 전쟁 막바지에도 피 냄새는 그치지 않았다. 조씨는 이때를 가장 치열한 고비로 기억한다. 응급차가 부족하여 일반 보급차량까지 동원되어 사상자를 운반했다. 드디어 7월 27일 10시 휴전이 조인되었다. 오랜만에 웃음이 나왔지만 쓴웃음이었다. 전쟁은 3년 2개월 2일 만에 끝났다. 1954년 7월경에 보병과 생활이 끝나고 헌병생활로 전환되어 1961년 7월 군복무를 마칠 때까지 있었다. 13년 4개월의 군 생활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전쟁이 끝나도 조성구 할아버지의 임무는 끝나지 않았다. 1968년 재향군인회 오성 분회장, 1995년 무공수훈자회 평택시 지회장 등을 역임한 조 할아버지는 지금도 전쟁과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전하는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지난 2002년에는 평택시의 지원을 받아 아산만에 무공수훈자 공적비를 세웠다. 2005년에는 한국전쟁 경과 비문을 새겨 전쟁의 역사를 전하고 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고 하잖아. 비극이지. 내 비극이기도 하고”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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