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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식 칼럼] 광장문화, 위기 아닌 교회 위한 기회
이러한 광장문화는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자발적으로 모여서 함께 뛰놀며 춤추고 환호하고 떠드는 모습은 이전에 전혀 볼 수 없는 문화입니다. 세계는 이러한 한국의 문화를 의미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사실 광장문화의 이면에는 민주적 자유에 대한 자신감이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감이 광장으로 모이게 한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전혀 누려 보지 못하였던 현상입니다. 독재 정권시절의 광장은 언제나 억압이거나 혹은 관제 동원 행사였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서울에서 열렸던 전국체전에서 마스게임으로 봉사(?)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순자 전 영부인의 얼굴이 가득 묘사되었습니다. 잠깐 왔다 가는 그 시간을 위해 대형 걸게 그림 모자이크로 장식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마치 북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장면이 서울의 한 가운데서도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모습이 광장의 모습이었습니다. 모두가 숨죽여 살아야 했던 시절의 슬픔 초상화입니다. 그러나 2002년의 월드컵 문화는 이러한 광장을 깨뜨리고 자유의 광장을 만들어 냈습니다. 새로운 광장은 놀이의 문화에서 정치적 의사표현의 문화로 나오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촛불입니다. 2002년의 광장이 없었다면 촛불 역시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화에 기성세대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민주적 자유가 가져온 결과는 참으로 놀라왔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광장은 돌이킬 수 없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번 2010년 월드컵 역시 이러한 문화의 연속성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자본주의 세력들이 등치고 들어와서 먹잇감을 추구하는 것이 이전의 모습과 다른 옥의 티가 되었지만 광장은 여전히 살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광장의 정체성에 대하여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의 시각이 현격하게 나타납니다. 막을 것인가? 개방할 것인가? 하지만 여기에는 문화적 생태보다도 자신의 정치적 이익이 달려있습니다. 이러한 논쟁은 앞으로 계속될 것입니다. 광장의 문화는 정치의 영역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광장 문화의 이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선 문화에 대한 바른 시각입니다. 문화는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문화는 능동적입니다. 그러므로 문화는 살아있는 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문화는 살아있으며 자라면서 변화를 가져 옵니다. 문화는 항상 성장합니다. 이것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문화는 머물러 있지 않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끝없이 자라납니다. 앞으로 어디까지 성장해 갈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문화의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흘러가는 물이 장애물을 만나면 잠시 주춤하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르면 넘어가거나 돌아가서 자신이 가야 할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번 6.2 지방선거는 이러한 광장세대들의 모습을 보여준 선거였습니다. 앞으로 이들의 활약은 대단할 것입니다. 광장세대들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과 문화를 바르게 분석하지 못한다면 정치하는 이들과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이들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광장의 문화는 광장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광장으로 모이는 과정에 있습니다. 더욱 세밀해진 개인주의는 인터넷의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무리를 만들며 자신의 생각을 표출합니다. 그리고 그 현장을 광장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은 세속적 지도자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영적인 지도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중요합니다. 지금 교회는 매우 힘든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이전 시대와 같이 일방통행식 신앙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안티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일부의 지도자들은 안티의 먹잇감이 되는 부정적인 이야기는 아예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이 말에도 어느 정도의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폐쇄 문화와 군사 문화로 대변되는 시대에 살았던 이들의 고정 관념입니다. 광장문화 시대에 있어서 이러한 반응은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를 이끌고 있는 40대 후반의 지도자들은 모두가 광장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시대입니다. 이 시대는 광장에 모이는 것을 불량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일명 날라리들이 모이는 것이 광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롤러장과 고고장으로 대표되는 광장은 기성세대들에게 그렇게 비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이 함께 모이는 곳이 광장이 되었습니다. 삶의 문제를 나누고 토론하는 곳이 광장이 되었습니다. 지금의 광장은 모든 정보가 소통되는 곳입니다. 비록 그 정보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것은 수없이 많은 정보가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문제를 숨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더욱 불의함이 재생산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광장으로 이야기를 가져와야 합니다. 그리고 광장에서 이 문제를 정직하게 나누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위험요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답할 것이 있다면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다시 소리를 높이는 것이 바로 공적 신학입니다. 공적 신학은 광장 문화 세대에 걸맞은 변증이 될 수 있습니다. 공적 신학은 새로운 신학이 아닙니다.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실현하는 신학입니다. 이미 종교개혁가들이 외쳤고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에 의하여 강력하게 외쳐졌던 신학입니다. 이것이 좀 더 시대에 맞게 세련되어진 것이 바로 공적 신학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광장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세대들과 함께 숨 쉬고 있습니다. 교회가 광장의 공간에 정직하고 투명하게 자신의 것을 내어 놓지 않는다면 교회는 공허한 사막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광장문화 시대에 처해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광장문화 시대에 교회가 가야 할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우선 앞서 말했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즉 교회 이기주의와 개 교회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서 이웃과 함께하는 지역교회의 본질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러한 회복이 광장문화 시대에 교회가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오픈돼 있는 시대에 걸맞은 교회의 모습은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 본연의 모습은 정직하고 투명한 공동체입니다. 일부의 사람들에 의해 밀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가 하나가 되어 거룩한 공동체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정직하고 투명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준에 합당하지 못하고 거짓을 행사할 때 하나님의 징계가 임하였습니다. 아나니와 삽비라의 사건은 이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살아날 길은 바로 정직함과 투명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는 행정과 재물 그리고 인사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성경적인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계로 물건 찍듯이 성도를 만들어 내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부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설교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단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전하는 연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설교가 정치적 선동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설교가 위로의 상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고백하였듯이 이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를 허무는 일입니다. 설교는 십자가의 도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회복되지 않는 한 사람들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자각이 없는데 어찌 십자가의 은혜를 알 수 있겠습니까? 설교의 추락은 기독교의 샤머니즘화를 부추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십자가의 복음이 선포되는 설교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입니다. 광장문화는 교회의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으면 당당하게 진리의 외침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왜곡되게 보였던 교회의 아름다움을 광장의 한복판에서 증거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광장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펼쳐질 수 있는 공간입니다. 교회가 좀 더 정직하고 균형 있게 광장에 선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단전재-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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