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대표적인 장로교단 중 하나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이하 기장)가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표면적으로 보면 기장의 탄생은 한국 장로교회의 두 번째 분열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1907년의 평양 대부흥운동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주류로 자리를 잡은 이른바 ‘개인적 내세적 구원관을 중시하는 보수 신앙과 신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신앙과 신학운동의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진>1946년 조선신학교 교수와 학생들

기장 60주년이 갖는 의미
 
이 같은 ‘새로운 신학과 신앙의 태동’에는 장공 김재준 목사와 조선신학교(한신대 전신)가 가리잡고 있다. 그는 송창근, 채필근 목사 등과 함께 1938년 조선신학교를 설립했고, 당시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한국 장로교회의 총회 인준 신학교가 없었기 때문에 194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조선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인준한다.
 
그러나 일부 신학생과 신학자들은 김재준 목사의 신학 노선과 교육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7년에 열린 제 33회 총회에서는 재학생 51명이 김재준 목사의 신학적 성향과 성경관을 문제 삼는 탄원서를 제출하기에 이른다.
 
이듬해인 1948년에는 장로회신학교가 재건되고 이듬해인 1949년에 열린 제35회 총회에서는 장로회신학교도 직영 신학교로 인준, 결국 한 교단에 두 개의 직영 신학교가 공존하게 됐다. 하지만 1951년 제 36회 계속총회는 조선신학교의 직영 인준을 취소했으며, 다음해인 1952년 제 36회 총회에서는 김재준 목사에 한 면직안과 조선신학교 출신 목회자에 대한 불채용안이 가결됐다. 나아가 1953년의 제 37회 총회에서는 면직 결의가 재확인되기에 이른다.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치달은 것이다.
 
결국 같은 해 6월 김재준 목사를 지지하는 조선신학교 측은 조선신학교 강당에서 ‘법통 제38회 총회’를 열고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자립자조의 정신, 세계교회 정신’을 표방하는 새로운 교단을 창립했고, 이듬해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장로회’로 개칭했다. 오늘날의 ‘기장’ 교단이 탄생한 것이다.
 
기장이라는 교단의 탄생은 당시 내걸었던 슬로건처럼 ‘복음의 자유, 신앙양심의 자유, 세계교회 정신’을 모토로 하는 ‘새로운 진보적 장로교단’이 한국에도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그런 면에서 기장의 탄생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기치로 탄생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측과 함께, 그동안 한국 장로교단에서 무수하게 벌어졌던 ‘교회 분열’과는 다른 차원에 이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많다.
 
기장의 이 같은 출범 정신은 내부적으로는 ‘사회참여의 신학’으로,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비롯한 에큐메니칼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에큐메니칼운동의 ‘하나님의선교 신학’을 적극 수용, 이를 다시 사회참여의 신학에 적용했다. 1970년대 이후 기장이 우리 사회의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참여의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신학’이 자리 잡고 있었단 것이다.
 
1970년대는 한국교회가 대규모 부흥운동을 통해 급격한 성장을 이룬 시기이기도 했지만, 국가조찬기도회의 시작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박정희 정권과 교회 사이의 ‘정교유착’ 역시 고착화되던 시기였다. 그 결과, 1970년대 말의 이른바 ‘긴급조치’와 ‘10월 유신’으로 대변되는 폭압적 독재 정권 아래에서 ‘인혁당 사건’, ‘민청학련 사건’같은 인권 유린 사태가 계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장의 교회들과 목회자들은 자신들의 신학을 바탕으로 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리고 기장의 이같은 경함은 ‘민중신학’으로 집약됐으며, 이것은 나아가 1980년대 꽃을 피운 ‘민중교회운동’의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1980년대 들어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한 뒤, 기장의 사회 참여는 민주화 인권운동과 민중선교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평화통일운동으로까지 넓혀져 갔다. 이것은 민주화를 위한 근본적인 요건이 민족 자주성의 회복과 이를 통한 분단체제의 극복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후 기장은 1980년대 들어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연구를 계속, 1987년까지 두 번에 걸쳐 평화통일문서를 만들어 낸다.
 
그러나 기장의 이같은 사회 참여는 큰 희생을 불러 왔다. 무엇보다 기장에 대한 독재 정권의 탄압이 극심했다. 박형규, 문익환 목사 등 목회자는 물론이고, 수많은 한신대 학생과 교단 청년들도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교단 소속 교회들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됐다. 노상예배를 드려야 했던 사울제일교회 사태나, 송암교회 본당 최루탄 투척 사건이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더 큰 희생은, 1980년대를 기점으로 교단의 성장이 완전히 침체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기장 교회에 대한 정권의 탄압과 공작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1970년대부터 시작된 한국교회의 보수화와 대형교회 중심주의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자 기장 내에서도 사회 참여에 대한 비판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그것은 성령운동과 교회 성장을 우선시하는 목회자 그룹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기장 소속 교회들 중에서도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이 적지 않다.
 
문제는 이처럼 교회 성장을 중시하는 경향이 갈수록 기장의 주류적 경향으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성장을 무조건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로 인해 기장이 출발 당시부터 내세웠던 신학적 신앙적 정체성, 다시 말해서 이른바 ‘기장성’이 엷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잆다.
 
왜나하면, ‘기장성’은 기장이라는 한 교단의 정체성에서 머무르지 않고, 70년대와 80년대 이땅의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며 고난을 마다하지 않고 예언자적 자세를 견지했던 한국 그리스도인 모두의 신앙고백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신앙고백이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준 것도 바로 ‘신학과 신앙양심의 자유’를 내세웠던 기장의 창립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한국의 현대 교회사에서 기장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이다. 보수적이고 내세적인 신앙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풍토 속에서, 기장은 그리스도교가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중요한 가치를 제시하고 실천해 왔던 것이다.
 
따라서 창립 60주년을 맞는 기장은 지금 ‘기장성의 재건’이라는 큰 과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기장 총회가 60주년을 맞아 발표한 선언문은, 지금의 상황에서 어떻게 ‘기장성’을 세우고 실천해 나가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이것을 제대로 실천해 나가면서 예전과 같은 동력과 에큐메니칼 지도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전적으로 기장에게 맡겨진 몫이다,
 
“우리의 기장성에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의 분리도 있을 수 없다. 한국 기독교 일각에서는 지금도 구원의 본질은 오직 개인의 영혼구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은 개인 영혼에 국한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개인과 사회만 아니라 온 우주를 포함하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와 지구의 모든 문제를 신앙의 문제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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