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봉 목사(포도나무교회)
우리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핵심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문제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이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은 자신들의 당면한 문제와 자신들의 삶의 필요를 위해 하나님의 도움을 줄기차게 구하는 것을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자신의 필요와 문제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 죄이거나 윤리적으로 부적절한 것이 전혀 아니다. 또한 그러한 기도를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좋은 예가 광야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다. 히브리서 3장은 그들을 본보기로 삼아서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들을 경고하고 있다. 

우선 그들은 40년 동안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들을 보았다.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히 3:9). 여기서 말하는 “행사”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들을 의미한다. 그들은 실로 인류 역사 이래로, 예수님 시대를 제외하고는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역사들을 경험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동일한 40년 동안 하나님을 근심케 하고 분노케 했다. “듣고 격노하시게 하던 자가 누구냐 모세를 따라 애굽에서 나온 모든 사람이 아니냐 또 하나님이 사십 년 동안 누구에게 노하셨느냐 그들의 시체가 광야에 엎드러진 범죄한 자들에게가 아니냐”(히 3:16-17). 이것을 보아도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들을 경험하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분노케 하는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의 사업이 잘 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신임을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렘 12:1-2, 계 3:16-17도 참조). 

그들이 하나님을 분노케 했던 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길을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이 세대에게 노하여 이르기를 그들이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 내 길을 알지 못하는도다 하였고”(히 3:10).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길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 하나님의 길과 방법,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 당시 아브라함 때부터 보이신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을 위한 한 백성을 세우시는 일을 이루어가고 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놀라운 권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셔서 광야생활을 통해 그들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사는 백성으로 훈련시키고 계셨다(신 8장 참조).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와 의중과 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럼 왜 그들은 하나님의 그 놀라운 행사들을 경험하면서도 하나님의 길을 전혀 알지 못했는가? 이점에 대한 좋은 힌트가 시편에 나온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 103:7). “행위”라도 번역된 ‘데라키’는 길이라는 의미의 단어이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는 하나님의 길을 보이신 반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길을 보이시지 않고, 하나님의 행사만을 보이셨는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길을 보이신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길을 구했기 때문이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모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의 길을 알기 원했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행하므로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늘 머물기 원했다. 그것이 그의 유일한 소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길과 의중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었다. 즉 모세에게 있던 그러한 자세가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의 처지와 형편에서 하나님의 도움과 역사만을 구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하나님의 행사만을 구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홍해와 같은 위기가 닥치면 그 위기에서의 도움을,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먹을 것을 구했다. 그들의 기도는 매우 절박했다. 홍해 앞에서의 그들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 

모세와 같은 자세가 없이, 하나님을 그저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고, 자기 목표와 목적을 위해 줄기차게 하나님의 도움과 역사만을 구하는 기도는 매우 위험하다. 그러한 신앙의 가치관에서 돌이켜지지 않으면, 때로는 그 기도가 응답될지 모르지만, 그 영이 죽어간다. 다시 말해서 영적 분별력이 어두워진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행하신 일을 곧 잊어버리며 그의 가르침을 기다리지 아니하고 광야에서 욕심을 크게 내며 사막에서 하나님을 시험하였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시 106:13-15).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을 찾는 말은 그저 당면한 필요와 자기 목적을 위해 줄기차게 하나님의 도움과 역사를 구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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