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는 필자에게 <킬링필드(Killing Field)>라는 영화로 다가온 나라였다. 1994년경 공 베드로 선교사 가정을 그곳으로 보내려던 중, 필자가 먼저 방문한 캄보디아는 수도 프놈펜이 조그만 도시의 모습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도시는 단순했는데, 필자가 최근에 그곳을 다시 들렀을
 ▲한정국 목사(KWMA 사무총장)ⓒ뉴스미션
때는 놀라운 경제 성장에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한인 선교사들이 그 땅을 'Living Field'로 바꾸는 모습이 대견스러웠다. 그러나 캄보디아를 일곱 번 방문한 바 있는 필자는, 그 역사와 선교 현장을 복기해가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캄보디아 선교 이렇게 했어야 했다”라는 다음의 글을 적어보았다.

캄보디아인의 역사의식

그 땅에서 정령숭배, 힌두교, 불교는 약 2,000년의 역사가 있다. 우리는 이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캄보디아인은 앙코르 제국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서구의 기독교, 즉 가톨릭은 90년 프랑스 식민통치로 인해 이미지가 아주 이국적이고 적대적이다. 그러한 피상적 이미지의 연장선상에서 1994년부터 한인 선교사들이 몰려왔으니, 그들의 눈에는 우리가 아류로 보이거나 유럽 기독교의 새로운 대리자로 느꼈을 것이다.

필자는 캄보디아 선교 역사에서 좋은 기회가 5번이나 찾아온 것을 확인하고, 많은 개신교 선교사들이 그 역사적 카이로스(하나님의 선교적 시간)를 놓친 것이 아쉬웠다.

캄보디아 선교의 카이로스를 놓친 5개 사례

△1953년: 프랑스 90년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해였다. 미국의 선교단체인 C&MA가 개신교의 이미지에 대해 기존 가톨릭교회와 작별하고 그들에게 저항(Protest)하면서 독립운동 세력의 한 부분으로서 불교권과 함께 독립을 위한 연대적 행위도 하고 자금도 지원했었다면, 개신교 이미지를 새롭게 긍정적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1970년 론놀(Lon Nol) 정권 때: 전국 주요 도시의 땅을 분양 받거나 민간과 정부로부터 구입(문서 만들어 놓음)해, Clinic, 교회(토착화된), 학교를 복합단지 식으로 건설하고 운영했다면, 지금의 좋은 기초가 됐을 것이다.

△1979년 폴포트 정권 멸망 전: 그 어두운 시대에 민족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태국에 세울 때, 개신교도 그 거사에 참여했다면 좋았을 것이다(한국의 이승만/김구 임시정부 참조). 그리하여 폴포트 후 다시 귀국해 학교, 병원 그리고 교회와 삼각 사역을 했다면 지금의 개신교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1993년 신정부 출범 때: 한국 교회의 Holy Triangle 전략 구사처럼 부동산 확보와 함께 학교(한국형 국제학교) 그리고 상황화된 토착적 교회당과 클리닉(양방, 한방, 캄방)을 병행 운영하여 불교의 삼각 역할과 건전한 대비 관계 및 사회 변혁을 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참고로 캄보디아의 불교 사원은 종교 행사 외에 학교와 단순 병원의 역할도 하고 있다.

△2013년 선거: 이 선거 때 새로운 기회가 있었다. 시하누크 왕의 아들이 이끄는 왕당파(훈신뻣)가 몰락하고, 민중이 시하누크에 대해 실망할 때, 그 대안으로 진정한 캄보디아의 구세주로서 예수를 소개하고 급진적인 사회변혁을 추구했다면 개신교는 새 시대의 아주 좋은 대안이자 해법이 됐을 것이다.

결어

역사에 가정은 없으나 과거 역사를 복기하면서,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에 대비한다면 이보다 현명함이 어디 있겠는가? 캄보디아 선교는 현재진행형이며, 지금의 그곳 선교는 다소 소강상태에 와 있다. 필자는 지난 한국 캄보디아 선교 22년을 검토하고, 지나온 역사 속에서 교훈을 찾을 수 있다면 내일의 한국 선교는 그 땅에서 많은 생명의 열매를 맺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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