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영 교수
성직주의를 넘어선 종교개혁

교계에서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1년 앞두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다양한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써붙인 95개 조항에는 많은 내용이 있지만, 그 핵심 중의 하나는 성직주의의 극복이다. 루터는 만인제사장 개념을 통하여 사제와 평신도 간에는 어떠한 존재적 차이도 없음을 천명하였다. 여기서 만인제사장은 단순히 오늘날 교회 안에서의 목회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말하기보다 영적 직분과 세속직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목회를 성직이라고 표현하듯이 성도들의 직업 활동 역시 거룩한 직분이며 하나님께서는 이 일로 모든 신도들을 부르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생계를 위해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직업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실 평신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성경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묘사되는데, 이 “하나님의 백성”의 희랍어 표현인 laikos와 laos에서 오늘날의 “평신도”(laity)라는 말이 파생되어 나왔다. 그러나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와 이원 분리로 평신도의 본질 성격이 구분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다. 성직자도 성직의 기능을 수행하는 신도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따라서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에는 기능상의 차이는 있지만, 존재적인 차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신자는 의미상 성직자 됨보다 선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만인제사장 개념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 이래 끊임없이 강조되어 왔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 상황에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어 계승되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에서라야 평신도의 역할을 바로 정립하고 실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래 개신교의 전통은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요구되는 엄격한 윤리 기준을 개신교인들의 모든 생활에 확대하여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의 의례로서 예배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실천 윤리의 행동 지향성이 각자의 삶의 무대 위에서 표출되어 나타나야 한다.

평신도 중심의 교회관

이러한 평신도에 대한 인식은 보다 근본으로부터 교회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다. 신학에서 말하는 교회론이 바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는 신학자들 사이에조차 의견이 엇갈린다. 대체로 합의하는 교회 본질의 특성들을 열거할 수는 있으나, 교회를 보는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다. 교회에 대한 관점은 또한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시대마다 특정한 역사 상황에서 특정한 교회의 생활과 형식이 나왔고, 특정한 신학자들이 되돌아보거나 내다보는 교회관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론은 끊임없이 변하는 역사 상황에 대한 응답인 동시에 요구인 것이다. 교회론은 교회 자체와 더불어 필연으로 계속되는 변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언제나 새로이 시도되어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자신들이 처한 시대를 개혁하기 위해 성서를 가지고 모든 것을 시험하고 그 원리를 적용하면서 그 당시의 문제에 답하는데 전력을 쏟았던 것처럼 이 시대에는 현재의 상황에 맞는 교회론이 필요한 것이다.

현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새롭게 강조되는 교회론은 평신도 신학과 관련된 교회론이다(‘평신도’라는 말 자체가 적절치 않고 대체되어야 할 단어이지만 마땅한 대체 용어가 없어서 평신도 신학자들조차도 이 단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현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서구 교회에서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평신도 신학의 필요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그것을 위한 평신도의 역할이 전략 측면에서 중요하다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19세기부터 서구 사회가 교회의 권위를 앞세운 지도로부터 이탈하여 세속화됨에 따라 비교회화와 비기독교화의 피할 수 없는 과정이 출현하게 되었으나, 서구 교회는 세속화되어 가는 사회에 적극 참여해야 하는 종교의 역할을 포기하고 스스로 고립되어 “종교 욕구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보호소”가 되어 왔다. 이에 세속화된 사회에서 법에 의해 부과될 수 없는 기독교 윤리의 담지자로서의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평신도 중심의 교회관은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에도 큰 역할을 한다. 성직자와 평신도를 구분해서 평신도를 부수의 위치에 고착시키는 것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저해한다. 평신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성직을 전담하고 있는 교회 지도자의 성직과 평신도의 역할을 이원론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기독교 봉사의 본질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흔히 평신도라고 하면, 마치 기업에서의 ‘평사원’과 같이 집사, 권사, 장로 등의 직분이 없는 ‘말단 교인’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평신도의 활동을 독려하는 평신도 운동은 종래의 성직자 위주의 교회관으로부터 교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위한 교회 혁신 운동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회 변혁을 위한 평신도의 역할

그러나 평신도의 올바른 자리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개의 교회 지도자들은 평신도들을 훈련시켜서 교회 안에서 많은 봉사를 하도록 요구한다. 요즘 보편화되어 있는 ‘작은 목자’라는 개념은 평신도를 목회의 동역자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나 자칫 평신도를 교회 안에만 매여 있게 하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있다. 물론 교회 안에서 필요가 있을 때 이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은 마땅한 일이나 평신도들이 교회 안에만 매여 있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상황이 아니다. 평신도는 오히려 소명을 따라 사회 활동을 통하여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종교 개혁의 영어 표현인 the Reformation은 단순히 종교 영역의 개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부패한 중세 기독교를 다시 세움으로써 새로운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혁은 종교를 포함한 모든 사회의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부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주장과 달리, 현실 세계를 부정하지 않고 그 안에서 초월의 기준에 따라 삶을 영위하며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개신교의 전통이다. 평신도들은 이미 세상에 보내진 자들이다. 일상생활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과 같은 일반 사회 안에서 보내는 평신도들은, 전문 목회자들과 같이 교회 안에서의 활동에 몰두하기보다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 평신도들의 삶의 자리는 ‘교회’가 아니라 ‘사회’인 것이다. 보냄 받은 사회 각각의 영역에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철저하게 기독교인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회생활을 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때 평신도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사회를 변혁시킬 주체자의 위치에 서게 될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주어진 사회 질서에 순응하며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의 본질을 변질시키거나 왜곡시키려는 세상의 질서에 타협하기보다 이를 변혁시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삶의 자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을 해치는 미친 운전자를 차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부상당한 사람들을 쫓아가며 치료하는 것보다 더 신앙적이라고 생각한 본회퍼 목사의 삶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는 믿음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는 값싼 은총 대신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값비싼 은총’을 역설함으로써 실천하는 신앙을 강조했다. 이러한 신앙의 실천이 더없이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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