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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운 대진사탑. 6년전보다 훨씬 더 기운 것으로 보아 계속 기울고 있는 듯 하다.(필자제공) |
며칠 전 서안에 있는 중국 최초의 기독교(경교, 네스토리우스파) 유적지 대진사(大秦寺)를 다시 찾은 건 6년 전의 아쉬움 때문이었다. 6년 전 대진사의 모습은 중국 최초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방치되어 있었다. 조만간 대대적인 복원을 계획 중이라지만, 당시로서는 버려진 기독교 흔적이었다.
마침 서안 섬서사범대에서 개최된 한중일 국제학술회의 초청을 받은 터라 좋은 답사기회를 맞은 셈이다. 홀로 가는 외로움을 달래보려고 학술회의 참석자들에게 얘기를 건네자 선뜻 한국, 일본 학자 열 여섯 명이 따라 나섰다.
대진사는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기독교 예배처소로 원래 페르시아(波斯)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파사사(波斯寺)로 부르다가 나중에 로마제국(大秦國)의 교회와 관련 있다 해서 대진사로 개명한 것이다. 명칭에 절 사(寺)자를 쓴 것은 당시 불교의 높은 벽을 실감케 한다. 역시 활발한 전교를 펼치던 이슬람사원을 청진사(淸眞寺)라고 한데서도 알 수 있다.
대진사는 일명 동방기독교의 하나인 경교와 관계있다. 경교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창한 중국식 이름으로, 431년 에페소스 공의회에서 예수를 신인양성(神人兩性)으로 보았다 해서 이단으로 판정된 바 있으나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설도 있다. 그 후 시리아에 본부를 두었던 경교는 이란을 거쳐 중국까지 그 세를 확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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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시내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품. 비 하단에 당시 선교사들의 이름이 명시돼 있다.(필자제공) |
경교가 정확히 언제 어떻게 중국에 전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진사와 781년 세워진 <대진경교유행중국비>를 근거로 말한다면 대략 당나라 태종 9년(635) 로마인 선교사 아라본(阿羅本)이 이끄는 공식적인 사절단이 수도 장안에서 황제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는 기록과 그 후 장안을 비롯한 전국 각 주(州)에 예배처소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아마도 훨씬 이전부터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문헌상의 기록을 접하고 한번 답사하겠노라고 출발했던 것이 2000년이니 지금부터 꼭 6년 전 일이었다. 그 때 알고 있던 대진사는 장안(지금의 서안)에서 150리 떨어진 곳이라는 문헌상의 기록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 한 가지 단서를 들고 무작정 서안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상세한 지도에도 대진사는 없었다. 궁리 끝에 혹 신부님은 알 수 있으려니 해서 서안시내 어느 성당을 찾았다. 기대했던 신부님의 대답은 (대진사에 대해) 들어는 봤어도 가본 적은 없다며 혹 알고 있을지도 모를 청년 한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마침 그 사람은 작은 승합차 기사였다. 용건을 말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대진사를 찾아 나섰다. 청년도 오래전 일이기에 대략적인 방향만 알뿐 자세히는 몰랐다. 아침 일찍 떠난 우리가 물어물어 대진사에 도착한 것은 오후 두세 시가 넘었으니 반나절을 농촌의 들녘에서 헤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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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안에 있던 붉은 옷입은 천사도.(필자제공) |
막상 찾았다는 성취감도 있었지만 눈에 들어온 대진사는 초라했다. 옥수수밭 한가운데 서있는 당나라식 전탑이 유일한 유적이고, 그 옆에 서너평 남짓한 기념관과 관리인 사무실, 그리고 탑을 절반쯤 점령한 이름모를 불교 사찰이 전부였다. 하지만 주변 옥수수밭과 길가에 널려진 깨진 와편과 주춧돌들을 보아 그곳에 제법 규모 있는 고대건축물이 있었음을 짐작케 하였다.
이번에 대대적인 복원의 모습을 상상하며 다시 찾은 대진사는 그 복원의 흔적이라곤 옹벽을 두른 것과 탑 바로 밑을 장악하고 있던 사찰을 옆으로 밀어 낸 것, 서안시내 비림에 보관된 <대진경교유행중국비>의 모조품 설치, 그리고 주변 옷수수밭이 밀밭으로 변한 것 외엔 없었다. 하나 더 있다면 탑 모양 전체가 전보다 더 기울어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되었다는 것.
탑 안과 밖을 장식했던 벽화와 조각상은 여전히 동방 기독교의 비밀을 말해 주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나온 예수와 그 제자들의 모습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이 곳 벽화는 실로 충격적일 수 있다. 벽화속의 모델들은 모두 몽골리안 아니면 한족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흰 옷 입은 천사대신 붉은 옷 입은 천사도 이곳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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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안에 있던 벽화.(필자제공) |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대진사가 위치한 이 궁벽한 농촌마을에 대형 천주교 성당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다는 것. 현지 수녀가 전하는 말로는 이런 규모의 성당이 주변에 네 곳 있고, 여기서 차로 2,30분 거리에는 신도 1700명이 다니는 대형성당도 있다는 것이다.
늦은 시간임에도 이들 성당을 둘러보고는 그것이 19세기 중엽이후 건립되었음을 알았다. 그렇다면 역사적으로 7,8세기 최초의 기독교 경교와는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그래도 전혀 무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혹 그 때 뿌려진 씨앗이 천년이 지나 발아한 것은 아닐까? 수 백 년 동안 이어진 복음의 씨앗이 모르는 사이 성장하여 지금의 이 모습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크고 많은 예배처소와 성도가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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